현재희 2024. 10. 8. 21:06

커다란 나머지
입력 중...


   *
   젤리. 며칠 전부터 돌멩이만 한 초록색 젤리에게 뒤를 밟히고 있었다. 긴가민가했지만 그 젤리는 확실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젤리를 알아차린 건 며칠 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막 새 학년을 시작한 교정은 반짝거리는 새내기들로 가득했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대로 조용히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와 부딪혀 가방의 짐을 다 쏟았다. 나를 치고 간 사람은 사과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모자를 눌러쓴 게 무색하게 이목이 집중되어 처음 보는 눈동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나를 치고 간 사람처럼 모든 짐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한숨 한 번 쉬지 않고 주저앉아 재빠르게 흩어진 물건을 쓸어 담았다. 화는 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했다. 옆을 흘끗 봤을 때 거기 초록색 젤리가 있었고, 나는 막연히 초록색 젤리가 있네, 사과맛이려나, 생각했다. 다음날 조금 더 커진 초록색 젤리를 현관에서 마주치기 전까지.
 

   *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고 나온 순간 흠칫, 누군가 봤다면 그 사람이 더 놀랐을 정도로 몸이 크게 놀랐다. 오늘도 초록색 젤리가 거기 있었다. 젤리는 며칠 밖에 나가지 않아 못 본 새 더 자랐는지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가 됐다. 흐물흐물 바닥을 기어 다니던 게(사실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른다.) 지금은 아장아장-걷는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나를 따라왔다. 그 며칠 새 젤리는 나보다 그 현관문이 더 익숙해진 것처럼 굴었다. 
   아직은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뒤를 의식해 돌아보니 젤리도 흘러내리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앞장서 걸었다. 초록색 젤리가 나를 따라오고 그 젤리가 하루가 다르게 자란대도, 학교에 출석하고, 과제를 하고,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오티 주간이라 수업이 일찍 마쳤다.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에 젤리가 이리저리 치였다. 인간들에 치이는 비인간 괴생명체(그러나 생명체가 아닐 수도 있다.)가 불쌍해 눈앞의 엘리베이터를 뒤로 하고 계단을 택했다. 스으윽, 퉁, 미끌거리는 소리가 났다. 학교를 빠져나와 다시 지하철을 탔을 때, 젤리는 아까보다 더 커져 내 허리는 거뜬히 넘었다. 나는 애써 젤리를 모른 척하며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젤리가 마주할 닫힌 현관문 따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벽장에 틀어박혔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잠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시간에 잠깐. 할머니가 초등학생 때 맞춰준 옷장이었다. 겨울옷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옷장을 열었는데, 핑계가 무색하게도 옷장을 열자마자 걸린 패딩과 코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오리털 패딩의 비린내가 났다.
   몇 해 전 엄마에게 꺼내진 후로 옷장에 들어가는 취미는 멈추었다. 엄마는 여전히 옷장 안에 있던 내 양팔을 잡고 가끔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이제 좀 잠잠하다 싶을 때마다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다그쳤다. 네가 이런 짓을 할 때마다 이해가 안 돼, 재희야. 너 정말 어떡하려고 이러니⋯. 나는 이제 안 할게, 하고 일어서서 두 발로 옷장에서 나왔다. 스스로 옷장을 닫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엄마가 말하는 ‘이런 짓’을 좋아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이상하게 보게 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옷장에 들어가 문을 꼭꼭 닫으면, 옷장이 세계의 전부 같아서 좋았다. 꽉 막힌 사각형 안에서 나는 가장 숨통이 트였다. 외롭지 않았다. 나로 완성되는 가장 좁은 세계를 가지고 싶었다. 외로울 때는 몸을 둥글게 말고 옷장 속에 박혀있었다. 손끝과 발끝을 감각하며 옷장에게 너는 왜 다른 세계로 안 이어져 있어, 맘속으로 원망해보기도 했지만 기필코 젤리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젤리는 그날 이후 내게 붙은 것이 틀림없다.
 

   그 후로도 젤리와의 기이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젤리는 나를 해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나에게 말을 걸거나 제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누구도 모르는 나의 소소한 등하굣길 메이트였지만, 나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젤리는 존재 자체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나는 나로부터 비롯되고 싶다. 누구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새 나만 해진 젤리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일이라, 집에 들어가기 직전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나는 젤리에게 그만 따라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만하자. 적당히 흥이 식은 애인에게 하는 말처럼. 
 
   나는 너를 신경 쓰기 싫어. 
 
   내 말 듣고 있지? 나는 나 신경 쓰는 것도 벅차. 
   손으로 귀를 가리켰다. 이해했지? 오늘만 해도 뒷문으로 나가는 교수님이 젤리를 통과했다. 젤리는 갈라지지도 않고 한 번 퉁, 일렁이고 말았다. 좋게 타일렀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도는 순간 사방이 환해지더니 젤리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따라오고 제멋대로 자라는 초록색 젤리에는 제멋대로 발광 기능도 있었다. 
   원래 사람은 너무 놀라면 비명 소리도 못 낸다. 젤리에게 입고 있던 회색 후드 집업을 뒤집어씌우고는 아무도 이 상황을 목격하지 않기를 빌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 이 젤리는 지금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이며, 빛은 어떻게 나는 것이며, 이런 것을 차치하고 애초에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벌어졌지. 나는 무사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싶어 눈을 떴다. 후드 집업을 들어 올리자 젤리는 어디 가고 사람, 사람 같은 생명체가 눈앞에 있었다.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외계인은 경우가 달랐다.
 
   你好.
   젤리는 중국어를 했다. 제노포비아는 아니었다.
   네? 
   내가 되묻자 젤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두 손을 모으고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미친놈아!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후드 집업을 다시 뒤집어씌웠다. 아무리 온몸으로 덮어도 계속 계속 빛이 새어 나왔다. 이 미친 젤리가 신고당하지 않길 기도할 때쯤엔 당황스러운 걸 넘어서 눈물이 났다.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고 젤리가 나에게 드디어 말을 건넸다.
 
   안녕.
 
   보고 싶었어.
   나를?
 
   웹툰이나 소설에서 외계인이 이런 말을 하면 로맨틱하던데, 나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 빛을 내뿜던 젤리가 해사하게 웃으며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한다.
 

   *
   너는 뭐 하는 외계인인데?
   뭘 하는 외계인은 아니지. 
   그럼?
   너를 외롭게 두지 않으려고. 너의 외로움이 날 불렀거든. 네 무한한 가능성이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인 나를 데려온 거야. 이해가 가지 않지. 너는 있어본 적 없는 세계니까.
   왜 너여야 했는데?
   내가 너의 나머지니까.
   ⋯.
   이해하지 못할 거라 했잖아.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
   젤리. 나의 커다란 나머지를 끌어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연애에서 전애인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냐. 내가 봤을 때 너는 사랑할 줄 몰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더라⋯ 나는 네 말 한마디에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내내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그런 생각을 했어. 한 번은 안아보고 헤어질 걸 그랬지. 난 네가 아니면 안길 사람이 없는데⋯. 아무도 나를 안아주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런데 잘못 생각했어.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야. 내 사랑은 잘 자랐어. 내 거니까 내가 알아.
   그리고 나도 잘못 생각했어. 안길 수 없으면 내가 먼저 두 팔 벌려 안으면 돼. 젤리를 만나고 알았어. 나 초록색 젤리를 만났거든. 한 번만 더 인간에게 안길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던 나를 가로로 세로로 크게 안아주는 젤리가 생겼거든. 나한테는 이제 달려가 안으면 나를 마주 안아오는 물컹하고 뜨끈한 젤리가 있거든. 인간보다 나아. 그러니까 너, 틀렸어. 네가 나에 대해 무얼 기억하든 다 내가 아니야. 이 커다란 나머지를 만나기 전의 나는⋯.


   *
   그 애를 만나고부터는 일 센티미터만 떠 있다. 나는 오 센티미터 위였다가 백 미터 아래였다가 중력이 작용하지 않던 인간이었는데. 상하좌우 마구마구 떠다녔는데.
   이제는 딱 일 센티미터만. 높이 일 센티미터 위의 나머지, 초록색 젤리와 함께 일 센티미터의 외로움.


   *
   추신.
   재희야, 우리 종족은 원래 둥근 모양이었대. 샴쌍둥이처럼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이 달린, 완전히 닮은 얼굴이 반대로 놓여 하나의 머리로 붙어 있는 모양으로. 교만함으로 인해 신의 벌을 받기 전까진. 
   내가 있던 행성에서는 다들 그 나머지가 있어. 그 나머지를 발견하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해. 운이 좋으면 태어나자마자 나머지를 만날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나 세상에 짝이 없는 젤리는 없어. 우리 유전자코드에 심어져 대대로 내려오는 거야.
   나머지는 곧 진짜 나로 향하는 열쇠니까. 생긴 게 좀 다르고 좋아하는 게 좀 달라도 어떻게든 알 수 있대. 그냥 알아볼 수가 있대. 나도 멀리 존재하는 내 나머지를 기다려왔어. 너를 보자마자 네가 내 나머지라는 걸 알았어. 다른 젤리들이 하는 말을 내가 다 알았어. 사는 차원이 달라도 너를 알아볼 수 있었어. 네 외로움을 내가 다 알았어.
   나는 네 생각보다도 더 오래 너를 기다렸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느꼈던 외로움을 내가 다 느끼고 있었어. 너는 내가 기다려 온 생명체야. 의심할 것 없는 나의 나머지야.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던 시절에도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불쌍하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고르는 인간이야. 도망가지 않고 후드 집업으로 나를 덮어준 인간이야. 너는 내가 기다려 온 외계인이야. 내가 너에게 그렇듯이. 네가 혼자 외롭지 않았으면 했어. 그래서 내가 여기에 왔어. 네가 외로웠다는 걸 내가 다 안다고 말해주려고. 내가 너의 나머지라고 말해주려고.
 
   내게는 해명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같은 운명을 받고 태어났으니까. 네가 여태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제 너의 중력이 되어줄게. 온몸으로 나를 끌어당겨온 너를 안아줄게. 이 말을 해주려고 너를 찾아왔어. 나는 너의 존재를 아는데, 너는 모르니까. 인간은 자신이 둘이었던 사실을 너무 쉽게 잊으니까⋯. 너무 외로워 마, 이제 내가 있으니까. 우리는 반원이 된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제 너에게는 필연적으로 내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