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방충망 너머를 원한다
너는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그러나 주말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만 먼 곳으로
황인찬, 마음
이맘때쯤 첫 실기 시험을 봤다.
k대는 기물을 사진만 보여줬고, 나는 장렬하게 다른(ㅎ;) 기물을 그렸다. 시험이 끝난 뒤 원장의 전화를 받고 심장이 툭 떨어졌는데... 합격은 또 어떻게 했다.
선 더럽게 쓰기로 유명했다. 스케치를 하고 나면 벌써 종이가 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타원을 그려도 다섯 번은 원을 돌려가며 그린다. 하트를 그려보라는 말에 눈물이 막 난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하트 그리는 방법이 무슨무슨우주협약으로 정해져 있다면 좋을 텐데.
잔선이 많구나. 뒤를 지나는 원장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많이 그려본 사람은 그 선 너머가 보이는 거라서. 나는 어디까지 들킬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미술학원에 다녔다. 숨기고 있는 것도 숨겨야 하는 것도 많았다.
원장은 내 자리에서 시범을 보일 때마다 내 눈을 몇 초씩이고 빤히 쳐다봤다. 그 눈과 마주칠 때면 나는 발끝까지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뭘 보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힐 만큼 원장의 눈은 새까맣고 탁했다. 번들번들한 눈. 기분 나쁠 정도로. 먼저 시선을 돌려도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었다. 두 개의 눈이, 그것보다 더 많은, ...아니다. 어쩌면 그 눈알들 전부 나를 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옷장 속으로 기어들어갔던 날들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를 호명하면 오 초 안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도망치고 싶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다녀왔습니다, 말할 자신은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다녀올게, 말할 자신은 없었을 때.
내가 방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준다면 나는 기꺼이 내 손으로 다시 옷장 문을 열고 나올 텐데. 그런데 옷장 속에서 눈을 감으면 내 앞엔 수 없이 많은 번들번들한 눈이 펼쳐진다. 여기쯤 다른 세계로 향하는 포탈이 만들어졌으면, 하고 옷장 뒤편을 더듬는다. 그러다 보면 한 명쯤은 나의 부재를 알아주었으면.
누군가 옷장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봐주기를 기도했지만 막상 누군가 문을 열면 당장 닫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갈게... 곧 나갈게.
*
다시 현재.
분명 소풍을 가야 하는 날씨인데 나갈 수 없는 핑계가 너무 많다. 요 며칠 날씨를 아끼지 않고 열심히 방 안에 존재하는 것에 몰두했다.
독감 예방접종을 맞았고 여전히 왼팔이 욱신거린다. 곧 자격증 시험이 있어 공부를 해야 한다(그러나 영원히 안 함). 시월 마켓 준비와 십이월에 있을 플리마켓 준비를 같이 해야 한다. 집에 두 끼 굶었다간 세상이 무너질 사람이 둘이나 있어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밥은 무슨 밥이야? 좀비가* 밥만 먹어도 내가 모질다고 느껴**져도 그들의 세상을 지켜주러 식탁에 앉아 밥을 씹는다. 어쩌면 나도 슈퍼히어로?
쓰고 보니 당장 할 일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전부 신경을 써야 하는 항목이라 마음이 바쁘다. 마음만 바쁘다. 실제로 행하는 것은 침대에 누워 숨 쉬는 것뿐이다. 숨을 쉰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호흡이 꼬이는 것뿐이다.
아, 정말이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침대에 눕는 게 좋아. 무릎을 껴안고 태초의 자세로 누워 있는 편이 좋아. 방충망 너머의 소리만 진짜인 것처럼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천장을 올려다보는 게 좋아.
오늘 할 일: 오답노트, 상세페이지 수정, 새 디자인 콘셉트 구성, 12월까지 대강 일정 짜기
오늘 할 일: 방 안의 날씨를 소중히 여기기
나를 좀 기다려줄 순 없을까. 나는 용기를 내는 게 서툴러. 원래 사는 게 좀 어색해. 알잖아.
몸이 회복되면 여행을 떠나야지. 바쁜 일이 끝나면 여행을 떠나야지... 이렇게 떠나고 싶은 마음만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떠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다. 나는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떠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언제나 바닥에서 오 센티미터 떠 있는 사람이다.
창문 앞에 서서 세계를 내려다본다. 우리 모두 방충망 너머를 원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누구나 방충망 너머를 원하잖아요.
날이 더 쌀쌀해지기 전에 정말로 바다에 다녀와야지. 새로 산 돗자리를 써봐야지. 도시락을 싸야지. 아무도 몰래 식물원에 가야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샤워를 해야지. 하루종일 방에 있었던 것처럼, 내게 할당된 자리에서 벗어난 적 없던 것처럼 비밀스럽게. 나만 아는 비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야지. 지상에 파견된 악마처럼.
*김개미, 좀비가
**김소연, i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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